필자는 강화도를 즐겨 찾는다. 내가 사는 곳과 비교적 가까운 점도 있고 역사의 향기를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강화도는 고려의 몽고에 대한 항쟁의 역사가 있고 무신정권 시절39년간 수도 역할을 한 바가 있다. 조선시대 정묘호란 당시 인조는 강화로 피신하기도 했다. 강화도는 조선말의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거쳐 제네랄 셔먼호 사건이 일어나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로 선조들이 피를 흘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은 인천의 유형문화재 60호인 강화도 송해면에 있는 고대섭 가옥을 찾았다. 송해면을 지날 때마다 유명 방송인인 고 송해 선생을 떠올리곤 했다. 또 이곳에 오면 생선구이와 간장게장으로 유명한 허름한 식당을 자주 찾았는데 그 곳 바로 앞이 고대섭 가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무심코 지나 다녔는데 그 가옥을 신축한 고대섭 선생의 증손자가 그 곳을 관리하는 주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고영한씨로 필자와 같은 비정규군 유족회의 일원이었다. 고영한씨의 조부는 6.25 전쟁 중에 HID 강화도 연락소의 책임자였다.
조선시대의 건축물처럼 칸과 칸 사이에 99개의 기둥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고 일제시대의 건축물로서 99평의 공간을 사용해서 새로운 건축기법으로 지어졌다. 이 집은 55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99칸의 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천시는 건축물로는 유일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보인다. 집은 외형적으로나 내부적인 모습도 깔끔하게 잘 보전되어 있었다. 증손자인 고영한씨가 집을 잘 관리하는 것 같았다. 문화재는 유형이든 무형이든 보존하고 관리하는데 돈이 들어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가가 관리하고 지방의 문화제는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하는 것이 문화제 보존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이 가옥은 4대 종손인 고영한씨가 혼자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부수리용으로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고 지금도 혼자서 잡초도 제거하고 수목도 관리하는 등의 노력 봉사도 하고 있다. 자신의 집을 가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명색이 지방 유형문화제라면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부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강화군수가 나름 신경을 쓰고 주변을 정화하는데 군비를 지원한바도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인천시 차원에서 제고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가옥은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함께 갖고 있다. 전쟁 당시에 김동석 대위가 지휘하던 HID의 강화도 지대장이 고영한씨의 조부의 사존형 김경녕씨고 조부인 고명선씨는 연락사무소를 책임졌다. 이 고택은 HID의 전시 본부로 쓰였고 이곳은 미군들과 비정규군 유격대의 연락 사무소로도 쓰여졌다. 전쟁 중에 자신의 집을 본부로 사용하게 한 고영한씨의 증조부 고대섭옹의 헌신도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이 고택의 종손은 제주고씨 전서공파의 21대 손이고 그의 고조할머니는 궁에서 나와서 양조장과 방앗간을 운영하고 부를 쌓았고 증조할아버지 고대섭 옹은 고조할머니의 사업을 물려받고 또 인삼농사를 지어 지금의 고택을 만들었다. 고영한씨의 조부는 HID를 나온 이후에는 고택의 보존과 지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의 부친도 고택의 관리에 소홀 하였던 바 그 몫은 4대 종손인 고영한씨의 책임이 된 것이다.
고영한씨는 자신의 일을 그만 두고 그의 어머니와 이 고택의 유지에 전념해 왔다고 한다. 고택을 건축한 고대섭옹의 4대 종손으로 조상의 유지를 받드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고택을 지키려는 책임감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병익 칼럼니스트 webmaster@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