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중앙 석희열 기자]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2명이 11일 새벽 울산 동구 남목고개 고가도로 기둥에 올라 "조선소 블랙리스트를 당장 폐지하라"고 외치고 있다.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사내하청지회 조직부장 전영수씨와 대의원 이성호씨다. 두 사람은 '블랙리스트 분쇄! 대량해고 중단!' '비정규직 철폐! 노동기본권 보장!'이라고 적힌 펼침막을 내걸고 고공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고공농성은 사회 곳곳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있고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016년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는 체불임금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그 이후 취업이 되지 않았다. 간신히 다시 하청업체에 취업했으나 일주일 만에 그는 다시 해고됐고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이처럼 일자리가 없는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취업을 위해 제출한 서류의 인적사항을 치면 컴퓨터 화면에 까맣게 변하고 아무 내용도 뜨지 않는 사람들. 죽음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날 울산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한 두 노동자는 4월 9일치로 업체에서 해고됐다. 업체 폐업으로 모든 인원이 다른 업체로 이관되거나 고용이 승계됐는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만 배제됐던 것이다.
까만 미래만 보이는 블랙리스트 사람들이 된 이들은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당장 폐지하고 하청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며 목숨을 건 생존권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목숨 줄을 이어가기 위해 원청업체의 눈치를 봐야하고 하청업체의 부당한 행위에 말 못하고 지내는 하청노동자들이다.
아직 해고되지 않았지만 하청노동자들은 모두 해고대기 상태라는 게 대한민국의 노동 현실이다.
업체는 취업규칙을 마음대로 바꾸고 수당과 상여금을 없애거나 삭감하고 있다. 잔업과 특근이 사라졌고 월급은 절반으로 반토막이 났다. 살아가기 위해 조선소에 들어갔지만 위험하고 힘든 업무에 배치되는 하청노동자들은 조선소에서 죽고 다쳐서 나온다.
하청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시킬 노동조합이 필수다. 헌법에 노동법에 보장된 모든 노동자의 권리다.
그러나 현실은 노조 가입이 취업을 가로막고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고용승계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청노동자들은 짤릴까봐 찍 소리 못 내고 참게 되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은 철저히 무시되고 노동조합은 무력화된다.
조선소의 블랙리스트는 노동자의 숨통을 쥐는 자본의 무기이고 노동권을 없애주는 업체들의 비밀병기다. 조선소가 위기라는 이유로 대량해고가 이뤄지고 있고 조선자본은 블랙리스트를 무기로 하청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방해하고 노동기본권을 빼앗고 있다고 한다.
이제 더 물러날 곳 없는 하청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하게 된 이유다. 더 많은 죽음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날 새벽 고공농성에 나선 두 노동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량해고에 동료와 가족들의 절망이 너무나 깊다"고 하소연했다.
차별이 일상인 이류 시민, 삼류 노동자의 무너지는 심정을 과연 누가 보듬어 줄 수 있을까라고 세상에 대고 외쳤다.
대량해고 구조조정 중단과 비정규직 철폐, 하청노동자 노동기본권 전면 보장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전영수·이성호 노동자는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의 뿌리까지 들어내 씨를 말리려고 하는 현대중공업 자본의 가공할 탄압에 맞서 결사항전에 나서달라"고 요구했다.
현대중공업은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죽음의 외주화로 최근 10년 간 70명이 넘는 노동자가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산재공화국' '죽음의 조선소'라는 오명이 늘 따라다닌다.
원청업체인 현대미포조선 쪽은 조선소 블랙리스트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리라고 했다.
현대미포조선 홍보팀 관계자는 <데일리중앙>과 통화에서 조선소 블랙리스트 존재를 묻자 "사실무근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또 농성 노동자들의 대량해고 중단 및 생존권 보장 요구에 대해 "도의적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고 있지만 원청에서도 희망퇴직과 무급휴직 등 고통을 분담하고 있는데 사내 하청까지 다 안고 가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블랙리스트 관련해 "사람을 뽑고 안 뽑고는 하청업체에서 자율적으로 할 일이지 원청업체에셔 이 사람들을 뽑아라 말라 하는 것은 법적으로 부당한 경영 간섭이 되는 것"이라며 "(고용 보장 관련해서는) 원청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