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행정법원 제1부(재판장 이승택)는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 업체에서 페인트 및 시너를 수거, 폐기하는 작업을 하다가 2011년 10월 다발성 골수종으로 사망한 김아무개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페인트 및 시너에 함유된 벤젠의 인체 유해성은 산업의학적으로 이미 밝혀져 있다. 현행 법령도 업무상 질병과 벤젠의 연관 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
국제암연구소는 벤젠을 1등급 발암인자로 분류하고 있고, 미국산업안전보건청은 공기 중 벤젠 허용농도를 1ppm으로 삼고 있다. 미국 전문가단체인 산업위생사협의회는 1990년 벤젠의 공기 중 허용농도를 0.1ppm으로 낮출 것을 권장했다.
한국은 벤젠 노출 기준을 10ppm 이하로 규제하다가 2003년경부터 1ppm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산재법 시행령은 ①벤젠 1ppm 이상의 농도에 10년 이상 노출됐거나 ②10년 미만이더라도 누적 노출량이 10ppm 이상이거나 과거에 노출됐던 기록이 불분명해 현재의 노출농도를 기준으로 10년 이상 누적 노출량이 1ppm 이상인 경우 다발성 골수종이 발병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보고 있다.
김씨는 1992년부터 현대중공업의 여러 사내하청 업체에서 선박 도장작업에 사용되는 벤젠 성분이 함유된 페인트, 시너 등을 폐기물 수집소로 운반해 잔류 페인트 등을 폐기용 드럼통에 부어 모으는 작업을 해왔다.
김씨는 잔류 페인트에서 나오는 가스가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페인트 등의 통 윗면을 절개하고 잔류물이 남지 않도록 맨손으로 페인트 등을 만지기도 했다. 폐기물 수집소는 반 개방된 장소여서 가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전문적 보호 장구나 환기 시설은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폐기 작업을 하루 3~4시간씩 하며 하루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김씨는 2002년 10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이후에도 같은 작업 환경에서 근무하다가 2011년 5월 다발성 골수종으로 인한 신장 손상으로 말기 신장병 진단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 만성 신부전에 따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김씨의 유족은 김씨가 업무상 장기간 노출된 유해물질로 발병한 다발성 골수종이 악화돼 사망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은 김씨의 최초 진단 시점이 입사 후 1년 6개월 정도였고, 실제 작업장 측정 결과 발암물질 노출 정도가 미미했다며 이를 거부했다.
이에 유족은 2013년 8월 공단을 상대로 이번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김씨의 최초 진단 시점이 입사 후 1년 6개월 정도라는 이유로 공단이 업무와 발병 사이의 인과 관계를 부인한 데 대해 "사망할 당시의 사업장에서 수행한 업무뿐만 아니라 사망 전에 근무했던 사업장에서 수행한 업무도 모두 포함시켜 판단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김씨는 1992년부터 현대중공업의 여러 사내하청 업체에 소속돼 일했지만 회사의 이름은 달라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였다.
재판부는 "망인이 1992년부터 페인트 및 시너 운반 및 폐기 업무를 약 7년 정도 수행하면서 상당한 양의 벤젠에 노출됐을 것이라고 추단할 수 있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인권 시민사회는 크게 반겼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천주교인권위원회는 19일 논평을 내어 "우리는 이번 판결이 고인의 업무와 발병 및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 책임을 유족에게 과도하게 지웠던 다른 선례와 달리 열악한 작업 환경과 한국의 유해물질 관리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특히 우리는 이번 판결이 조선업계, 그 중에서도 현대중공업에 만연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죽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국해양플랜트협회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2013년 현대중공업 조선 부문의 기능직 2만5063명 중 사내하청은 1만7157명으로 68.4%에 이른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원청인 현대중공업으로부터 도급받은 하청회사 소속이지만 원청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와 유사한 업무를 하고 있다.
지난 4월 기업인권네트워크 등이 만든 '현대중공업 산재발생에 관한 의견서'에 따르면 조사를 시작한 2000년 이래 가장 많은 수인 13명이 2014년에 사망했다. 그런데 사망자 모두가 사내하청 노동자였다고 한다(울산 산업재해추방운동연합 집계).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은 '산재공화국' '죽음의 조선소'라는 오명이 늘 따라다닌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산재사망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원청 대기업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을 하청업체에 내맡기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잇따른 산재 사망 사건은 위험의 외주화가 부른 참극인 셈이다. '진짜 사장'인 현대중공업 대표가 책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실제 지난해 국회 환노위 새정치연합 은수미 의원이 공개한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산재 사고가 줄었다는 이유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000억원 가까운 산재보험료를 할인받았다.
원청이 산재 발생 가능성이 높은 작업 부문을 의도적으로 하청업체로 이전함으로써 자신의 산재 발생률은 줄이는 '위험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권단체들은 "산재 예방과 사고 후 책임의 법적 문제를 하청업체에 전가하는 사내하청 제도와 노동자의 건강권은 양립할 수 없다"면서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산재를 포함해 자신의 사업장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재해에 책임을 지고 사고 예방과 피해자 구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성훈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