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롯데면세점의 '관세법 개정 대응문건'은 지금껏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한 재벌 면세점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롯데면세점은 자신의 사업권을 지키기 위해 정부·언론·학계뿐만 아니라 법적 소송까지 제기할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벌 면세점의 시장 장악을 왜 막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일 국회 기획재정위 새정치연합 윤호중 의원실과 CBSi-더스쿠프가 공동으로 입수한 내부문건에 따르면 롯데면세점은 관세법 개정(2013년 1월) 이후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재부·관세청 등 유관기관, 언론, 심지어 헌법소원제도까지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취지로 개정된 관세법의 효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여론전에 소송전까지 준비한 셈이다.
정부는 지난해 관세법 개정을 통해 면세점 특허수(매장수 기준)의 20% 이상(2018년부터 30%)을 중소·중견기업에 주고,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은 60% 미만으로 못박았다.
관세법을 고친 이유는 국내 면세점 업계의 '재벌 과점 문제'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다.
롯데면세점은 또한 중소기업을 우회적으로 지배하는 전략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2013년 한국관광공사의 인천국제공항 면세점(KTO) 사업권이 중소기업에 넘어갈 것에 대비해 '고급 수입브랜드 등 수입품의 소싱전략'을 마련한 것.
이는 수입브랜드의 계약·주문·수급을 자신들이 도맡겠다는 뜻으로 KTO 사업권을 따낸 중소기업을 우회 지배하겠다는 전략이다.
롯데면세점은 연 매출 3조원이 훌쩍 넘는 국내 면세점 업계 1위(시장점유율 51.1%·2012년 기준) 업체다.
관세법 개정 직후인 2013년 초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롯데면세점의 이 내부문건은 제1편 관세법, 제2편 인천 KTO로 구성돼 있다.
제1편엔 관세법 개정에 따른 대응방안이 담겨 있다.
정부정책과 관련해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정책으로 중소기업 보호 분위기 확산 △면세업 대기업 독점 논란 △향후 관세법 개정을 통한 중소기업 특허 확대를 예상하면서 그 대응방안으론 한국면세협회와 함께 기재부·관세청 등 유관기관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관광서비스·한류진흥을 내세워 문화체육관광부에 정책을 건의하자는 전략도 세웠다. '재벌 면세업 과점'의 명분을 정부와 유관기관에 전파해 중소업체의 활로를 막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여론몰이 전략도 들어 있다. 국가연구기관(대외경제정책연구원·한국조세연구원) 컨설팅, 대학 교수의 언론 기고를 통해 '재벌이 면세업을 맡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알리는 게 골자다.언급했듯 헌법소원을 활용한 대응전략도 모색했다. 이도저도 안 되면 관세법 개정안의 '정체성'을 흠집내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윤호중 의원은 "국내 면세시장은 재벌 대기업(롯데면세점·신라면세점)이 30년 넘게 독점적으로 운영해왔다"며 "두 업체가 관세법 개정안의 취지인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콘셉트'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내부문건을 보면 매우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롯데면세점 관계자는 "문건에 담긴 내용은 상황에 따른 대응방안 중 하나였고 실제론 시행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상 입법 로비 정황이 드러나끼 때문.
내부문건 제1편의 '경과사항' 항목에는 새정치연합 홍종학 국회의원 등 14명이 관세법 개정안을 발의한 2012년 12월 이후의 진행상황이 적시돼 있다.
골자는 면세협회(법무법인)와의 공동대응을 통해 여야 국회의원, 기재부, 관세청에 ▷(면세점은) 중소기업에 부적합한 업종 ▷특허할당 비율의 부당성을 적극 알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효과를 보이며 홍종학 의원 등이 발의한 관세법 개정안은 원안보다 약해졌다.
중견·중소 면세업체의 특허비율이 관세법 개정안의 원안인 50%에서 '20% 이상'으로 낮아졌고, 대기업의 특허비율은 30%에서 60% 미만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결과는 '관세법 개정에 대비해 전략을 세웠을 뿐 시행하지 않았다'는 롯데면세점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내부문건 제2편 '인천 KTO'에는 롯데면세점의 중소기업 우회지배전략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2012년 말 인천공항공사는 KTO(한국관광공사 인천공항 면세점) 자리에 새 사업자를 선정하는 입찰을 냈다. 입찰참가자격은 자산 5조원 미만의 중견·중소기업으로 못박았다. '면세업 상생'을 위한 조치였다.
KTO의 시장점유율은 2012년 당시 9%, 매출은 연 1753억원에 달했다. KTO가 시장에 나오자 수많은 중견·중소 면세업체가 눈독을 들인 이유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롯데면세점(호텔롯데·롯데DF글로벌)이 '인천 KTO'에 은근슬쩍 발을 들여놨다.
내부문건을 보면 롯데면세점은 '새 사업자(중소기업)가 선정되면 BTQ(부티크)의 수입품을 소싱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BTQ는 루이뷔통·샤넬·에르메스·구찌·프라다 등 글로벌 브랜드의 매장을 말한다.
수입품 소싱은 이런 브랜드와 매장개설에 합의하고 공급계약을 체결해 상품주문·수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롯데면세점은 루이뷔통·샤넬 등 수입브랜드의 상품주문·수급을 자신들이 도맡겠다는 전략을 세운 셈이다.
이렇게 수입품 소싱을 대행하면 면세점의 핵심 기능은 사업자가 아닌 롯데면세점으로 넘어간다. '수입품 소싱'을 롯데면세점의 우회확장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다.
윤호중 의원은 "내부문건에 기록돼 있는 수입품 소싱전략은 중소기업이 시장에 진입하더라도 돈이 되는 유통 부문은 잡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통을 지배당하면 실제 사업이 종속되는 효과가 발생해 제아무리 능력 있는 중소기업이라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
내부문건에 나오는 롯데면세점의 수입품 소싱전략은 공정거래법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중소 면세업체 육성이라는 취지와는 전면 배치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롯데면세점 쪽의 입장을 듣기 위해 이 회사 홍보실에 오전내내 통화를 시도했으나 단 한 차례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석희열 기자 shyeol@daili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