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고문으로 조작된 '울릉도 간첩단사건'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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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문으로 조작된 '울릉도 간첩단사건'을 아십니까?
  • 김인회 기자
  • 승인 2015.04.03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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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유신시절 47명을 간첩으로 조작... 국가범죄 청산은 국가의 의무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인회 교수가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웹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는 '단비칼럼 52'의 전문을 미래연의 동의를 얻어 데일리중앙에 싣는다. '단비칼럼'은 '단숨에 읽는 비평 칼럼'의 줄임말이다. 필자인 김인회 교수는 참여정부 시민사회비서관,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미래연 부원장을 맡고 있다. - 편집자 주

▲ 대법원은 지난 1월 26일 이른바 '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징역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을 한 5명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사진=YTN 뉴스화면 캡처)
ⓒ 데일리중앙
1974년은 도대체 어땠을까? 민청학련,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발생, 긴급조치 발령. 이런 일이 줄줄이 발생한 1974년의 분위기는 어땠을까?

박정희 종신통치를 위한 유신은 시작되었으나 안정되지 못했다. 악명높은 유신헌법의 개정 논의조차 막는 긴급조치를 줄줄이 발령해도 유신에 대한 반대는 높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좋아하는 중동 건설붐이 시작된 것도 1974년이다. 한국 경제는 오일쇼크 속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 경제도 발전하고 있었고 민주화의 요구도 높아지고 있었다. 사회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던 시기였던 것은 틀림없다.

1974년의 백미는 민청학련 사건이다. 판사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의 수사결과가 발표된 것은 1974년 4월 25일. 그런데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만큼 중요하지만 그 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간첩단 사건이 1974년에 발표된다.

1974년 민청학련, 인혁당 외에 또하나의 흑역사 '울릉도 간첩사건'

1974년 3월 15일 울릉도간첩사건이 발표되었다. 10년 동안 울릉도를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해 온 대규모 간첩망 일당 47명이 검거되었다는 것이었다.

간첩은 대학교수, 강사, 고교교사, 교회목사, 의사, 정당인, 은행원, 주부 등 여러 직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재판은 확정되었다. 3명이 사형에 처해졌고 징역형은 짧게는 5년, 길게는 무기가 선고되었다. 사형수 3명은 1977년 12월 5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보다 가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잘 모르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 담당자로서, 그리고 민변 출신으로서 과거사 사건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도 생소한 사건이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정리한 '울릉도 1974, 긴급조치 시대가 만들어 낸 울릉도 간첩단 사건 이야기'(뿌리와 이파리)를 읽기 전에는 나도 몰랐다.

이 책은 최창남 목사가 울릉도 간첩단 사건 연루자 중 8분을 직접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면서 당사자들의 아픔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고문의 실제와 그 고문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짤막한 문체와 자세한 감정 전달로 전하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3명 사형집행에 5년~무기형까지... 재심끝 40년만에 극소수만 최종무죄 확정

이 사건 관계자 중 무기징역을 받은 이성희 선생은 다행히 명예를 회복했다. 이성희 선생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재심을 통하여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가 일본에 있을 때 북한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성희 선생이 최종 무죄로 확정된 때는 2014년 12월이다. 사건 발표 후 무려 40년이 지난 후이다. 일제 강점기보다 더 긴 세월이다. 그 동안 이성희 선생은 전북대학교 교수에서 무기수로 전락했고 평생 간첩으로 살았다. 그는 전북대학교에서 총장으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건에 관련되었던 피해자들의 재심은 계속되고 있다. 김용희 선생 등 5명은 올해 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재심을 신청하지 않은 선생들이 있다. 그때의 악몽을 다시는 되살리기 싫어서, 그리고 법정 근처에도 가기 싫어서 재심을 신청하지 않는 것일까? 무죄이지만 판결문에는 여전히 유죄로 되어있는 현실을 바꿀 희망도 사라진 것일까? 마음이 무겁다.

피해자들 고문 증언... 몸과 마음 부러뜨리는 고문에 공포 시달려

고문은 반인간적인 형벌이다. 반드시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과거에 발생한 고문은 진실을 규명하고 상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확인한 사실이다. 이 사건 피해자들은 담담하지만 분노를 담아 고문의 실제를 증언하고 있다.

고문은 먼저 사람의 몸을 부러뜨린다.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완전히 저항을 상실할 정도의 고통을 가한다. 고문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고문은 사람 자체를 부러뜨린다. 저항하려는 마음 자체를 없애버린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여기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 이쯤 되면 조서의 내용도 보지 않고 공소장의 내용도 보지 않는다. 고문 피해자인 손두익 선생은 지금도 공소장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은 공포를 확산시킨다. 그 공포는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이런 고통을 가족들이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발전한다. 이 사건 피해자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가 혹시 같이 잡혀온 가족들의 비명이 아닌지 공포에 시달렸다. 공포는 공포를 낳는 법이다.

진실 말했지만 검사·판사 모두 무시... 지금이라도 국가가 사과해야

▲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데일리중앙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이 끝나자 검사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검사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법원에서도 진실을 이야기했다. 법관도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로부터 40년 간 이들은 간첩이 아니면서 간첩으로 살았다. 이들의 가족은 간첩의 가족이었다. 일상생활, 가족관계는 완전히 무너졌다. 일반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연애, 취업, 여행, 창업 등의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 피해자들이 살아남아 진실을 증언한 것에 대해 사회와 국가는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좁게는 검찰과 법원이, 크게는 국가가 사과해야 한다. 무고한 자를 잡아다가 고문과 불법구금으로 간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가 스스로 범죄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재심 과정에서 검찰은 이들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범행을 시인하는 듯이 진술한 것을 두고 증거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들 피해자들이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주장을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고 이돈명 변호사님의 표현에 의하면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검찰의 실상이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키려고 한다. 법조인의 양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의 양심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지독한 고문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나

사람을 부러뜨리는 고문에서도 이들 피해자들은 살아남았다. 그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지옥에서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어렴풋이 그 힘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이성희 선생은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고문도 고문이었지만 수사를 받는 동안 자신이 살 길이 없고 결국 사형을 당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도 읽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은 부인의 사랑에서 삶의 희망을 찾았다. 선생은 부인의 편지와 면회에서 사랑을 확인했다.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이 선생을 살린 것이다.

선생이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을 변호한 결과 1심의 사형도 2심에서 무기징역형으로 낮아졌다. 가족의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최규식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는지 걱정했다.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고 멸시받고 푸대접 받으며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면회 온 문중 사람들에게 문중 사람들의 뜻을 물어 보고 만일 자신을 받아주겠다면 100원짜리든지 500원짜리든지 동전을 받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다음 면회 때 문중 사람은 선생 앞에 수십만 원이 든 동전 주머니를 내려 놓았다. 그날 선생은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최규식 선생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991년 가석방된 후 2012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문중의 사랑이 그를 살린 것이다.

조작된 간첩단 사건에 검찰이 나서 재심 청구해야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아직 진행형이다. 사건 피해자 모두의 인권과 명예가 회복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도에 의하면 7명만 재심으로 무죄로 확정되었다. 나머지 피해자들은 영구보존되는 판결문에 의하면 간첩으로 남아 있다.

폭력적인 국가에 의하여 간첩으로 조작된 평범한 사람들. 이들 중 일부는 용기를 내어 재심을 신청했고 그래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일부는 재심을 신청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유야 알 수 없다. 이미 사망한 분도 있고 다시는 검찰청이나 법원 근처에 가고 싶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다. 재심을 신청할 용기도 희망도 없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국가가 나서서 이들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만든 것이 국가였다면 이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의무도 당연히 국가에게 있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전부가 고문으로 조작되었다.

따라서 국가기관인 검찰이 피해자 전부를 파악하여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재심을 청구하고 무죄를 구형해야 한다. 과거의 사건이라고, 과거 검사의 일이라고 외면해서는 안된다. 개별 검사는 바뀔 수 있지만 검찰이라는 조직은 계속 남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만 검사는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조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이 재심을 청구하고 무죄를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명백하다. 검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공안부의 영향이 훨씬 크다. 과거 간첩단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인정하면 현재의 공안정국을 유지할 동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검찰이 개혁되지 않는 한, 구체적으로는 공안부가 개혁되지 않는 한, 같은 사건에서 무죄와 유죄가 공존하는 이 불편한 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김인회 기자 shyeol@daili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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